살인자의 기억법

살인자의기억법

올해 일흔이 된 연쇄 살인범 김병수. 그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25년 전. 더 이상 살인을 하지 않고 무료한 삶을 살아왔지만 그런 그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리고 기억을 점점 잃어버리게 된다. 오래된 살인의 기억은 추억으로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지만 일상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최근의 기억들은 무심히도 머릿 속에서 사라져 간다. 지키기 위한 존재가 있어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이미 쪼그라든 그의 뇌 속의 해마는 그 기억들을 지워 나간다.

책을 쥔 순간부터 다 읽기까지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한 호흡으로 읽어 버렸다. 지켜야 할 것이 있어 기억을 붙잡고 사력을 다 하는 한 노인이 있었고 그런 그의 노력을 비웃 듯 하나 둘 씩 사라져 가는 기억들. 치매란 병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었는데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라면 다른 기관들이 망가지는 것보다 더 자괴감이 들며 고통스럽게 소멸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그라스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뇌의 친밀감을 관장하는 부위에 이상이 생길 때 발생하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가까운 사람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더이상 친밀감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중략)

결국 이 환자는 낯선 세계에 유배된 것과 같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얼굴의 타인들이 모두 함께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믿는다.

살인자의 기억법 p. 17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혼자 있다고 느끼는 감정. 굳이 병이 걸리지 않더라도 느끼는 감정들이 아닌가?

죽음은 두렵지 않다. 망각도 막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세가 있다 한들 어떻게 나일 수 있으랴.

살인자의 기억법 p.28

나는 기억력이 나쁜 편이다. 어려서부터 머리맡에 지우개를 하나 놓았다 생각하고 잠이 들기 전 최면을 건다. “잊어 버린다. 잊어 버린다.” 되뇌이며 잠들면 다음 날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말끔하게 지워지는 그런 패턴이었다. 하지만 이런 패턴은 부작용을 동반하는데 “잊고 싶은 기억”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잊고 싶지 않은 기억”까지 지워지는 식이다.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다. 죽기 전에 바보가 될 테고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될 테니까.

살인자의 기억법 p.52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은 기린다. 죽은 사람은 본인을 기억할 필요가 없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기억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기억들도 잊혀지고 결국 망자(忘者)가 된다.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미래 기억’은 앞으로 할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었다.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게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중략)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어쩌랴, 레일이 끊기면 기차는 멈출 수 밖에.

살인자의 기억법 p.93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내 지론 중에 하나였는데, 매일 다람쥐 쳇바퀴처럼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에게 미래 기억이 필요한 걸까?

작곡가가 악보를 남기는 까닭은 훗날 그 곡을 다시 연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악상이 떠오른 작곡가의 머릿속은 온통 불꽃놀이겠지. 그 와중에 침착하게 종이를 꺼내 뭔가를 적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콘 푸오코 con fuoco – 불같이, 열정적으로 – 같은 악상 기호를 꼼꼼히 적어넣는 차분함에는 어딘가 희극적인 구석이 있다. 예술가의 내면에 마련된 옹색한 사무원의 자리. 필요하겠지.

살인자의 기억법 p.115

머릿 속이 복잡하여도 결국 정리하여 무언가로 표현하고 나면 보잘 것 없을 때가 많다. 사고의 깊이를 깊게 하기 위해서는 머릿 속에 사무원 하나씩은 채용해 두어야 할 일이다. 밑천도 없는데 말이지.

그런데 알츠하이머에 걸린 내 뇌는 반대로 작동하고 있다. 오래전 과거는 생생하게 보존하면서 미래는 한사코 기록하지 않으려 한다. 마치 내게 미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듭하여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 미래라는 것이 없으면 과거도 그 의미가 없을 것만 같다.

살인자의 기억법 p.116

미래가 없는 삶에 과거가 가지는 의미가 있을까?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살인자의 기억법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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